주자의 심법 - 깨어있는 방법, 윤홍식 역 고전/철학

안녕하세요! 무위입니다.

명상을 통해 깨어있음에 대하여 말하는 분들은 많지만 일상에서의 깨어 있음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분은 적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일상에서의 깨어 있음에 대하여 가장 정확하게 말씀을 주시는 분이 바로 '주자'이십니다. 우리들에게는 성리학이라는 고리타분한 학문 때문에 조선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으나 이 분의 글에서는 우리가 배워야 할 많은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글에서는 주자의 깨어있는 방법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흩어진 마음을 모으라(求放心)”는 말에 대한 이런저런 논의는 마치 불가와 도가에서 말하는 “입정(入定)”과 같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끝나 버리지만, 우리들은 오히려 이 마음이 주재가 되어 안정될 때 비로소 이것을 바탕으로 바깥일을 하니, 이 점에서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주자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말씀입니다. 유가의 깨어있음과 불가나 도가의 깨어있음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는 것 같습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진짜 깨어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래는 주자의 깨어 있음에 대하여 윤홍식 선생이 번역 요약한 내용입니다. 읽어보면 참 와닿는 글들이 많습니다. 주자의 엑기스라고 보입니다. 생활속의 명상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참조하세요.

1. 사람이 혼란스러울 때는 마음이 밝지 않다. 자신이 혼란한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즉시 마음이 밝아진다. 

2. 서암화상 같은 이는 매일 항상 자신에게 “주인공이 또렷한가?”라고 물어 보았고, 또 스스로 “또렷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요즘 학자들은 오히려 그렇지 못하다. 

3. 내가 보기에 공부의 핵심은 오직 “정신을 차리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반드시 몸소 체험해서 스스로 분명히 해야 한다. 

4. 몸가짐이 방종한 것은 단지 마음이 어둡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려 깨어있도록 하면 저절로 밝아지고 정신이 밝아지면 자연 몸가짐이 방종하지 않는다. 

5. 사람에게는 주재하는 하나의 마음이 있으니, 항상 불러서 일깨워야 한다.

6. 다만 자주 마음을 일깨울 뿐이니, 오래 되면 저절로 익숙해진다.

7. 배우는 사람이 늘 해가 떠오르듯이 이 마음을 일깨운다면, 많은 사사로운 것들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본래 밝게 빛나며 넓고 크니, 자신은 다만 조금의 힘을 들여 그것을 일깨우고 보살피기만 하면 된다. 억지로 힘을 들이지 말라. 힘을 들이는 것은 도리어 옳지 않다.

8. 지금 이 순간, 몸과 마음이 또렷이 존재하게 한다면 이미 8,90% 정도는 된 것이다. 도리를 살피다가 막히는 곳이 생기면, 오히려 이 막힌 곳에서 이해해 간다. 학문을 할 때에는 우선 한 곳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 이 한 가지를 이해할 때에는 우선 이 한 가지만 이해해갈 뿐이다. 걸어갈 때는 오직 걸어가는 데 마음을 두며, 앉을 때는 오직 앉는 데 마음을 둔다.

9. 이제 일상생활에서 한가로울 때 지금 이 순간에 또렷하게 마음을 모으면, 이것이 바로 “희노애락이 발동하지 않는 중(中)”이며, 바로 “온전한 하늘의 이치(天理)”이다. 일이 닥치면 그 옳고 그름을 따르니, 옳은 것은 곧 하늘의 이치이고 그른 것은 하늘의 이치를 어기는 것임을 저절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항상 이렇게 이 마음을 추수려서 모아두면, 곧 저울을 쥐고 사물을 재는 것과 같다. 

11. 세상에는 단지 선(善)과 악(惡) 이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천지간의 음양을 예로 들어보자. 바람이 온화하고 태양이 따뜻하면 만물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선(善)의 뜻이다. 여러 음(陰)의 기운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만물이 시들고 메말라 간다. 사람에게 악(惡)도 그러한 것이다. 천지(天地)의 이치는 원래 음의 기운을 막아서 항상 이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학자는 반드시 선(善)과 악(惡)에 대해 두 경계의 갈림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지, 미세한 악(惡)이라도 끼어들어 선의 단서가 끊어지게 하지 말라. 

12. 마음을 텅 비고 고요하게 할 뿐이니, 오래되면 저절로 밝아진다. 

13. 사람의 마음은 본래 밝다. 다만, 사물과 일들에 덮이고 가리어 얼굴이 드러난 적이 없기 때문에 도리를 비추기 어려운 것이다. 먼저 덮이고 가리는 것을 걷어내길, 그것이 스스로 드러날 때까지 여러 차례 해 보라.

14. 사람의 마음은 늘 생각하게 마련이다. 생각할 때는 생각을 해야지, 스스로 억지로 힘들게 억눌러서는 안 된다. 도리어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는다.

15. 사람은 온갖 변화에 통달해야 비로소 마음이 차분해지고 한결같이 모을 수 있다. 

16. 항상 정신을 또렷하도록 해야 한다. 오래되면 익숙해져서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자(顔子)는 단지 경(敬)을 지녔을 뿐이다. 

17. 사람이 일념으로 깨어있는(敬) 순간, 이 마음은 바로 이 몸에 있게 된다.

18. 마음은 본래 밝은 것이지만, 단지 “이기적 욕구”에 의해 어두워졌을 뿐이다. 이제 학문을 하는 까닭은 그 밝은 것을 더욱 밝히려는 것이다. 마음이 밝으면 이 일에는 이런 도리가 있고, 이 사물에는 이런 이치가 있다는 것을 자연히 알 수 있다. 

19. “경(敬)”이란 단지 이 마음 안에 주인공이 깨어서 주재하는 것이다. 

20. “경(敬)”이란 온갖 일들에 손을 놓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에 따라 정신을 하나로 모으며 조심하고 삼가하며 방종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21. “경(敬)”이란 단지 마음을 거두는 것일 뿐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는 것이다. 

22. “경(敬)”이란 단지 삼간다는 뜻이다. 

23. 정신을 차리기만 하면 바로 “경(敬)”이 거기에 존재한다. 

24. 나도 옛날에는 곧장 도달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원래 다른 방법이 없다. 오직 익숙하게 하는 것뿐이니, 익숙해지면 저절로 “경(敬)”의 상태가 오래 갈 수 있다.

25.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일이 없을 때가 없다. 일이 없다면 죽었을 때뿐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일들이 있다. “일이 많아서 어지러우니 나는 우선 정좌(靜坐)를 하겠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경(敬)”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일이 앞에 닥쳤는데 스스로 고요해지려고만 하고 완고하게 일에 응하지 않는다면, 바로 마음이 아주 죽어버린 것이다. 일이 없을 때는 경(敬)은 마음속에 있고, 일이 있을 때는 경(敬)은 그 일 위에 있다.

26. 마음을 함양할 때는 반드시 “경(敬)”으로 해야 하고, 일을 처리할 때는 반드시 “의(義)”를 쌓아가야 한다. 

27. 반드시 한 순간의 생각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아야 한다. 좋은 일이고 해야 할 일이라면 반드시 해야 한다. 혹 이 일에 대해 철저하게 생각하지 못했으면, 반드시 끝까지 생각해야 한다. 좋지 않은 일이면 하지 말라. 스스로 그와 같이 깨닫는 순간 “경(敬)”은 바로 거기에 있다. 

28. 그대들이 진보하지 않는 것은 정신과 생각이 하나로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부가 그렇게 정밀하거나 예리하지 못한 것이다. 

29. 모든 것을 내버리고 사물이 이르러도 “내 마음이 간직되어 길러질 때를 기다리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 또 다만 망연하게 다른 사물을 따라가서도 안 된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끊어버려야 한다. 

30. 일을 만나지 않았을 때는 반드시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 그래야 일에 임해서 마음을 써야 할 때 바로 “힘”이 생긴다. 

31 대체로 기질이 속된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마음이 평정되면 기질은 저절로 조화로워진다.

32. 마음이 올바르게 되어야 ‘성(性)’이 선한 것을 알 수 있다. 

33. 배우는 사람의 공부는 우선 저 느닷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잘라 버리는 것이다.

34. 성현의 수많은 말들은 오직 사람들에게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욕(人慾)을 없애라”고 가르친 것이다. 천리에 밝으면 자연히 학문을 강론할 필요가 없다. 사람의 본성이 본래 밝은 것은, 마치 보배 구슬이 혼탁한 물에 가라앉으면 밝은 빛이 나지 않다가 혼탁한 물을 제거하면 보배 구슬이 저절로 예전처럼 밝아지는 것과 같다. 스스로 욕심에 가려진 것을 안다면 바로 (천리가) 밝아지는 자리이다. 다만 이 밝아진 곳에서 바짝 노력하여 마음을 챙기면서, 한편으로 사물에서 이치를 알아 갈 뿐이다. 오늘 한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내일 한 사물의 이치를 밝히면, 마치 군사를 보내 성을 함락시키는 것처럼, 인욕이 저절로 녹아 사라질 것이다.(주자 저, 윤홍식 역)


성리학의 정수 - 근사록(주렴계, 정명도, 정이천) 고전/철학

염계선생이 말하기를, "무극(無極)이 곧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서 양(陽)이 생기고, 그 움직임이 극에 이르면 고요함이 된다. 이 고요함에서 음(陰)이 생기고, 고요함이 극에 이르면 다시 움직이게 된다. 이렇게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한 것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서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져서 양의(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오행(五行)인 수(水), 화(火), 목(木), 금(), 토(土)가 생기며, 이 오행의 다섯 가지 기운이 순조롭게 퍼져서 사시(四時)의 운행이 이루어진다. 오행은 음양에 하나로 되고, 음양은 곧 태극에 하나로 통합되니,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이 생기는 데 있어서는 저마다 다른 하나의 성(性)을 갖는다. 무극의 진실한 것과 음양오행의 정(精)이 묘하게 합하여 엉켜서 건도(乾道)가 남(男)을 이루고, 곤도(坤道)가 여()를 이룬다. 그리고 이 남녀의 기운이 서로 감응(感應)하여 만물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물이 차례로 나고 또 나서 그 변화가 무궁한 것이다.

오직 사람만이 가장 빼어난 기운을 얻어서 신령스럽고 형체를 갖추어 생겨나면 정신이 발생하여 지혜가 열린다. 오행의 성(性)은 외물(外物)에 감응하여 선과 악의 구별이 생기고 만사가 생겨나는 것이다.

성인(聖人)은 중(中). 정(正), 인(仁), 의(義)로써 정하고 고요함을 근본으로 하니, 인극(人極)이 서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天地)의 덕(德)을 같이 하고, 일월(日月)의 밝음을 같이 하고, 사시(四時)의 차례를 같이 하며 귀신과 그 길흉(吉凶)을 같이 하여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군자는 이런 것을 닦으므로 길한 것이고, 소인은 이런 것을 거역하므로 흉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의 도(道)를 세워서 음과 양이라 말하고, 땅의 도를 세워서 유(柔)와 강(剛)이라 말하며, 사람의도를 세워서 인(仁)과 의(義)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일의 근원을 찾아서 연구하여 그 끝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죽고 사는 이치를 아는 것이다.' 하였으니, 아아! 크고 큰 역(易)이여! 그 이치가 참으로 깊고 지극하다." 하였다.

마음은 하나다. 체(體)를 가리켜 말하는 경우도 있고 용(用)을 가리켜 말하는 경우도 있다. 오직 그 보는 방법에 따라 잘 관찰해야 한다.<이천문집 여여대림논증서>29

인(仁)이라는 것은 천하의 공이요, 선(善)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이천역전>34

명도선생이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각기 부족한 이치가 없다. 항상 생각할 것은 천하의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데 조금이라도 다하지 못한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하였다. <정씨유서 제1>39 

 


장자 - 대종사(진인의 호흡) 고전/철학

옛적의 진인은 잘 때는 꿈을 꾸지 않았고, 깨었을 때엔 근심이 없었고, 먹을 단맛을 탐내지 않았고, 호흡은 깊고 가라앉아 있었다무릇 진인의 호흡은 발뒤꿈치에 이르도록 깊이 쉬었고, 범인의 호흡은 기껏 목구멍에 들락거릴 뿐이다.

범속한 사람은 말할 때 목구멍에 무엇이 걸려 있는 듯 떠듬거리고, 욕심이 많은 사람은 정신적 기능도 천둔(淺鈍) 뿐이었다.

 

 


장자 - 마음의 재계 고전/철학

마음의 재계란 어떻게 하는 겁니까?”

 

먼저 마음을 전일(專一)시켜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그리고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며, 마음은 사물을 영합할 뿐이다. 그러나 기는 공허한 것이면서도 모든 사물을 용납하기도 한다. 도는 오직 이 공허한 심지(心地)에만 모인다. 이 심지가 공허한 것을 마음의 재계라고 한다.”

 

안자가 말했다.

 

제가 마음의 재계를 미처 몰랐을 때엔 제가 안회(顔回)임을 의식하였으나, 마음의 재계를 알고 난 뒤로는 제가 안회임을 다시는 의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공허한 심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장자 - 제물론(성인은 상대의 입장이 아닌 절대의 입장에서 사물을 본다) 고전/철학

장자의 제물론을 보면 노자 도덕경 2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지혜와 마찬가지로 비교분별의 상대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않고

오직 자연의 입장 다른 말로 하면 '참나'의 입장에서 사물을 본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장자의 내용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구절들을 한번 매칭시켜 보았습니다. 노자, 소크라테스, 석가모니의 말씀과

한번 비교해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이 있기에 생겼고, ‘이것’은 ‘그’가 있기에 생긴 것이다. 같이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의 관념은 상대적으로 발생된 것이다. () 상대되는 것으로 () 있고, 사에 상대되는 것으로 생이 있다. 마찬가지로 가능에 상대되는 것으로 불가가 있고, 불가에 상대되는 것으로 가능이 있다. 옳은 때문에 그른 것이 있고, 그른 때문에 옳은 것이 있다.(장자)

 

도덕경 2장 :

천하사람들이 모두 () 안다고 하는 것에서 추함이 생기며, 모두 착함을 안다고 하는 것에서 착하지 않음이 생긴다. 이런 까닭에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생겨나게 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성립시켜 주며 길고 짧음은 서로 모양을 만들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를 분명하게 하고,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는 서로를 조화시켜주며,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르게 한다.

 

파이돈(소크라테스/플라톤)

 

"이제 상반되는 것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반드시 그 상반되는 것으로부터 오며, 결코 다른 데서 비롯되지 않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세. 예를 들어, 무엇인가 커졌다는 것은 먼저는 작았던 것이 보다 더 크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겠나?"
 
"약함은 강함에서, 빠름은 보다 느림에서 오지 않았겠나?"
 
"그 점에 동의한다면, 상반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즉 그것들은 모두 그것과 상반되는 것에서부터 나왔다고 말이네."

 

 

때문에 성인이라야 상대적 입장에 서지 않고, 자연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시비의 상대성을 초월한지라 시비와 피차 사이에 아무런 분별이 없는 것을 있는 것이다.(장자)

 

도덕경 2장 :

이런 까닭에 성인은 무위(無爲) 바탕으로 일을 처리하며, 드러내지 않고 행하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을 만들면서도 말하지 않고, 성장시키면서도 소유하지 않는다.  행동하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 Mission) 완성시키면서도 거기에 안주 하지 않으니, 대저 오직 안주하지 않음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시비나 긍정, 부정은 모두 절대적인 아닐세. 시비의 대립은 모두 허환(虛幻) 것이라 결국 대립이 없는 것이나 같은 것일세. 이런 허환한 대립을 자연적인 원칙에 화합시켜 자연 무한한 변화와 운행에 몸을 맡기고 하늘이 준 목숨대로 살아가는 것이네. 그러면서 세월을 잊고 시비를 간파하여 시비의 명의(名義) 잊고, 무궁한 우주 속에 노닐면서 그 무궁한 절대적 세계에 몸을 맡기는 걸세!”

 

→금강경 32장 :

(, 고정관념, 비교 분별한 상대적인 생각) 집착하지 않고 본래 모습 그대로 흔들리지 마라. 일체의 현상계는 꿈이요, 허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같고, 번개불같은 것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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